디자인학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 특강 - 3강 그래픽 디자인의 아이디어 (1)

그래픽디자이너 K아저씨 이야기 2024. 9. 27. 23:53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 특강 - 3강  그래픽 디자인의 아이디어 (1)


아이디어, 너 어디 있니?  

 

오래전, 런던의 한 상인이 가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어느 고리 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늙고 욕심 많은 고리대금업자는 상인의 딸에게 오랫 동안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므로 빛 대신 딸을 자기에게 주면 빛을 탕감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상인과 딸은 깜짝 놀라 그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리대금업자로부터 이 문제를 신의 뜻으로 결정하자는 두 번째 제안이 왔다. 그것은 주머니 속에 검은 돌과 흰 돌 두 개를 넣어두었다가 딸이 그속에서 하나의 돌을 꺼내되 흰 돌을 꺼내면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빛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검은 돌을 꺼내면 역시 빛은 탕감해 주되 딸을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제안조차 거절하면 채무 불이행죄로 감옥에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상인은 여러 날 동안 고민했지만 그가 스스로 결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결말을 보기 위해 상인의 집 정원으로 몰려들었다. 고리대금업자는 조약돌이 깔려 있는 정원에서 그가 준비해온 주머니 속에 두 개의 조약돌을 집어넣었다. 이 때 상인의 딸은 불안에 떨고 있으면서도 늙은 고리대금업자가 각각 다른 색의 조약돌을 집어넣는 척 하면서 두 개 모두 검은 돌을 집어넣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제 그녀는 늙은이가 가지고 있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돌을 끄집어 내더라도 검은 돌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선택이란 늙은이의 아내가 되는 길로 연결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엉큼한 늙은이는 돌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상인의 딸에게 조약돌을 꺼내어 여러 증인들에게 보이라고 재촉하였다.
  
이 에피소드는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사고법에 대한 연구자로 우리에게 친숙한 에드워드 드 보노(Edward De Bono)가 쓴 "수평적 사고"의 서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약간 각색하여 옮겨 적은 것이다. 1970년에 이 책이 한국능률협회에서 처음 번역 출판되었을 당시 디자이너들의 충격은 컸다. 이 책은 우리들이 무엇을 새로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움을 찾아 나설 수 있는 방법을 국내 최초로 일러준 본격적인 안내서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와 비숫비숫한 사고법에 대한 저술이 다수 출간되어 그가 쓴 수평적 사고에 대한 소개는 이 시점에서 낡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사고법의 안내서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퇴색되지 않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드 보노의 일화를 통해 새로운 사고의 현주소를 추적해 보자. 

만일 우리가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 상인의 딸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대체로 다음의 해결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1) 고리대금업자가 제의한 게임을 전면 거부한다. 
(2) 주머니 속에는 두 개의 검은 돌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러한 비열한 속임수를 구경꾼(중인)들에게 공개하고 비난한다.  
(3)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 딸은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그 제안에 묵묵히 따른다.  
(4) 스스로 목숨을 끊어 문제 발생의 원인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해결방안은 어떠한 경우라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1)과 (2)는 어떤 식으로든 늙은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보복을 받게 될 것이고 (3)은 늙은이와 부부가 되어 원하지 않는 일을 일생 동안 감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4)는 해결 방안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항목일지도 모른다. 이같이 논리적인 사고의 끝점에는 상인과 딸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상황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상인의 딸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나머지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다. 

상인의 딸은 손을 주머니에 넣어 조약돌 하나를 끄집어내는 순간, 어지러운 듯 정원 바닥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주머니로부터 꺼내들었던 조약돌은 쓰러질 때 마당 위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꺼낸 조약돌이 어떤 색깔의 돌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몸을 일으킨 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나, 제가 실수를 저질렸군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염려 마세요. 주머니에 아직 남아 있는 조약들의 색깔을 확인해 보면 제가 지금 떨어뜨린 돌이 어떤 색깔의 돌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늙고 교활한 고리대금업자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없이 꺼내든 돌이 검은 조약돌이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딸이 마당에 떨어뜨렸던 돌은 흰 돌이었던 셈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에피소드의 처음과 나중을 모두 소개하였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문제해결을 위한 사고(思考)의 플로우 차트(흐름도)를 들여다 보자.

 

* 논리적 사고로는 해결방안 없음
* 수평적 사고로 문제 해결 
- 돌을 뽑는다 
- 넘어져 실수로 돌을 잃어버린다 
-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돌로 먼저 선택한 돌을 짐작하도록 한다

  

문제는 제시 조건과 결과 사이의 비논리성이다. 모두 검은 돌뿐인 주머니 속에서 흰 돌을 뽑는 것이 어찌 합리적일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검은 돌만이 있는 주머니에서 흰 돌을 뽑았다면 그는 기적을 행하였거나 트릭을 구사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에 합당(합리)한 결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논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해 보면 이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버섯을 먹고 죽었다. 그런데 1년 전 이웃 동네에서도 비슷한 버섯을 먹고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본 버섯을 그려 놓은 그림에서 이번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버섯과 그 생김이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사건을 일으킨 버섯의 그림은 두 마을에 자료로 비치되었고 요주의 식품으로 잠정 분류해 놓고 있있다. 수 년 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였다. 즉시 그림과 대조해본 결과 동일한 버섯으로 판정되었다. 보다 상세하게 그려진 버섯 그림은 그 뒤로 먹으면 안 될 독버섯의 학습 자료가 되었다.  
그 후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자가 있었다. 그는 버섯 중에는 이와 유사한 독버섯이 더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버섯 연구에  들어갔다. 수많은 자생버섯을 채집하여 그림으로 도판을 만들고 집토끼에게 버섯을 먹이는 실험을 수년에 걸쳐 실시하였다. 결국 독버섯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였고, 그가 만든 버섯도감은 그 뒤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건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예화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논리는 긴 세월 동안 인간 체험과 발견에 바탕을 둔다. 물론 논리학은 인간의 지식활동에 관련된 원리들을 분석하고 이들을 체계화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귀납적 지식 그 자체가 논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논리라는 음식을 만드는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지식에는 귀납적 지식 외에 연역적 지식이라는 것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네 발 달린 것들을 즐겨먹는다. 책상은 네 발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은 책상도 즐겨먹는다.' 에서와 같은 지식을 말한다. 물론 이 경우는 첫번째 명제에 오류가 있기 때문에 잘못 연역된 주석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명제들이 인간의 체험이나 발견을 전제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에드워드 드 보노는 인간지식과 논리적 사고법이 결국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고 보있다. 그리고 날줄에 건줄 수 있는 시간의 속성에 따라 이러한 인간 사고에 수직적 사고(Vertical Thinking)라는 별칭을 붙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수직적 사고란 논리와 합리의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고를 말한다. 이같이 수직적 사고에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는 이 안에서 '새로운 착상' 을 얻어낼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두에 의해서 이미 증명된 것들로부터 우리가 '새롭다' 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사고법으로서 수직적 사고의 대칭 사고로서의 '수평적 사고(혹은 녹색 사고)' 를 주창하였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가를 말할 수 있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수평적 사고, 즉 녹색 사고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는 '논리의 실린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라는 요리를 가능하게 하였던 '원재료' 의 상태로 실린더 밖에 있는 것들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생각의 방식인 것이다. 논리로 가공된 식품들은 이미 검증을 끝내고 실린더 안에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착상을 가능하게 하는 생각의 재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들은 논리의 통 속에는 없고 그 통의 바깥 부분에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조개껍질들처럼 널려져 있다. 그것들은 무질서의 상태에 놓여 있는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이며 언제 니타날지 모르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조개껍질을 주워서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매어 새로운 목걸이나 팔찌를 만들 수도 있고 색색의 조약돌을 주위서 그것들로 카페의 벽면 하나를 세롭게 꾸밀 수 있다. 이들은 기존의 목걸이나 인테리어가 아니기 때문에 세로운 느낌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올 수 있다. 아이디어는 수평적 사고의 원천인 '실린더 밖의 초록색의 뜰'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림 3-1 새로운 아이디어는 '수평적사고(녹색 사고)' 영역에서 얻어진다.
그림 3-1  새로운 아이디어는 '수평적사고(녹색 사고)' 영역에서 얻어진다.

 

 

 


[출처]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특강 - 인간심리와 그래픽디자인. 미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