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 특강 - 4강 그래픽 디자인의 창조성과 미메시스(3)
표절
표절이라는 단어에서의 '절(竊)'은 좀도둑이나 몰래 홈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작품이 표절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당연히 훔치는 대상과 홈칠 의도가 있는지의 여부이다. 그러나 표절이라는 포장을 한 겹 벗기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내용물로서 소유권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소유의 개념은 표절에 앞선다.
우리 자신이 어떤 대상을 소유하며 그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소유와 그 가치를 서로 인정한다는 상응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일 상대의 소유물 중 어떤 것을 부당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그 순간 상응성의 균형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공기나 물처럼 무소유성이나 공유성이 있는 대상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미술 작품이나 디자인 작품에 있어서도 이와 똑같은 내용을 말할 수 있다. 하늘이나 산, 들, 강과 같은 자연 대상들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고 또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해왔던 의미의, 모방의 대상은 될지언정 표절의 대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문화적 유산이거나 문화적 공유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83년 동경고법의 판례가 이에 대한 좋은 보기가 될 수 있을것 이다. '야기볼드' 의 서체를 개발한 서체 디자이너가 그 서체를 이용하여 출판물을 제작 발행한 결과물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항소인은 저작권법, 의장 등록법, 부당 경쟁방지법 등을 들어 호소하였으나 패소하였다. 그 주된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만일 공유의 문화적 재산인 문자에 대하여 비록 그것이 새롭게 디자인되있다 할지라도 특정인에게 배타적으로 독점시켜버린다면 그 법적인 보호 기간에 걸쳐 타인의 사용을 배제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비록 그것에 대한 창작성이 일부 인정된 다 할지라도 더불어 상속받은 민족적이고 문화적 유산은 공유하도록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판결로서 같은 해에 이루어졌던 미국의 판례를 보자. 이 사건은 MGM사가 '오즈의 마법사' 에 등장하는 주인공 '도로시' 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 이를 기념품으로 만들어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이슨이라는 사람이 이에 응모하여 당선되었으나 회사에서 제시한 계약 조건에 만족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계약을 포기하였다. 이 그림은 오클랜드라는 사람에 의해 다시 그려졌는데, 이때 그레이슨은 비록 일부 수정되었다 할지라도 그 그림에 대한 원래의 저작권은 자기에게 있다면서 법원에 제소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패소로 끝났다. 독창성을 너무 폭넓게 해석할 경우, 저작물들의 창작을 중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법정 시비가 시사하고 있는 공통점은, 그것들이 공유되어야 하거나 더불어 나누어 가짐으로써 보다 우리의 삶을 풍요 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다소의 새로움을 주거나 독창성을 띠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보호되는 결과가 소유의 편중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작품의 표현기법이나 레이아웃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론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의 레이아웃이라든가 표현기법을 도용했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대할 수 있다. 만일 표현기법이나 레이아웃에 대한 법적인 보호 를 인정하게 된다면, 제한된 능력의 소유자인 인간이 개발해 낼 수 있는 변수도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한 작 가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극도로 제한을 받게 되거나 어떠한 작품도 모든 부분에 걸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제작할 수 없 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공유물의 분배 이외에 차용을 통해서도 우리는 소유를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제되어야 할 요건은 차용의 의 도성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의 부재중에 이웃에서 망치를 빌리는 행위는 본인의 본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절도 행위에 해당한다. 마을 공유의 농기구를 차용할 경우에도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빌려오지 않으면 의심을 받게 된다. <모나리자> 를 차용한 마르셀 뒤상의 <LHOOQ>라든가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인물의 포즈와 레이아웃을 그대로 차용한 레코드 광고 등은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로, 혹은 광고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오직 그것을 공공연하게 빌려옴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나 극적인 메시지를 끌어내 올 수 있다는, '차용의 의도성' 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에서 은밀하게 따오는 행위는 공개된 의도성의 결여로 인해 표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한계는 애매하다.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가의 기준 설정은 그 시점에서의 문화적 환경에 따를 뿐이므로 결국 공유하나 자신의 것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공유하거나 분배되어야 할 성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말하자면 이러한 요소들을 이용하여 새롭게 느껴질 만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는 사고나 작상에 근거할 수밖에 없디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표절에 따른 도덕성의 문제
작품의 표절 행위는 다른 사람의 창작적 소유를 부당하게 훔치는 행위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법 이전의 문제 이다. 홀륨한 법이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야말로 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 다. 왜냐하면 법의 정신은 마침내 법 그 자체를 없애려는 의도에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표절 문제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표면화되기 이전에 누구보다도 그 문제에 대해서 일차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일 것이며, 어떤 것을 홈칠 의사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그의 양심의 문제가 될 것이다. 때로는 공유와 문화적으로 분배되어야 할 것들과 차용 가능한 것들 사이에서 그 경계의 애매성 때문에, 또 때로는 작가의 사고와 착상이 우연히 다른 지역의 다른 사람들과 일치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표절은 작가의 고의성 내지는 자의성이 바탕에 깔리게 됨으로써 자신을 황폐화시키고 문화를 좀먹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 자신을 위해서나 소속된 사회를 위해서 관계법 이전에 스스로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와 슬기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창조와 모방, 표절에 관하여 일별해 왔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 한계는 때로는 애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디자이너 각자가 그러한 경계선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그래픽 디자이너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스스로 자정 능력을 길러 외부로부터 조롱 섞인 지적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
모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모방하고, 차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차용을 해오며, 공유되어야 할 것은 서로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 지만, 로고스에 견주어칠 수 있는 창조적 착상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것을 도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다.
[출처]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특강 - 인간심리와 그래픽디자인. 미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