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학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 특강 - 4강 그래픽 디자인의 창조성과 미메시스(2)

그래픽디자이너 K아저씨 이야기 2024. 10. 4. 18:19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 특강 - 4강 그래픽 디자인의 창조성과 미메시스(2)

 

4강 그래픽 디자인의 창조성과 미메시스

디자인의 창조성과 미메시스(Mimesis)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고 있었던 시대에는 오늘날의 의미에 해당하는 창조라는 어휘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 시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모두가 굳게 믿고 있었으며 모든 것들은 이데아의 세계에 먼 저 존재(存在)하는 형상, 혹은 그 안에 갖추고 있는 동인에 따라 질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자연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사물들을 모방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행위에 그들은 미메시스 (Mimesis)라는 용어를 썼다.

 

 당시의 미메시스는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사물의 겉모습을 복제(Copy)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또 하나는 자연이 작용하는 방식을 따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비행기나 잠수함, 각종 탈 것 등은 날짐승, 물고기, 네 발 달린 짐승들이 지니고 있는 형태나 행태(行態)의 미메시스이고, 베를 짜는 행위는 거미, 집을 짓는 일은 제비의 미메시스이다. 따라서 이 모방이론은 예술에 이르는 거역할 수 없는 참다운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적어도 로마제국의 몰락(5세기)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소위 중세암흑기라고 불리는 약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르네상스(14~16세기)와 바로크(17세기) 로코크(18세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세암흑기의 야만적이고 인간성이 박탈된 시대를 뛰어 넘어 그리스시대의 시대정신을 다시 부흥시키고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말하자면 오랫 동안 유럽을 지배해왔던 신 중심의 시대를 뛰어 넘어 인간의 지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다시 찾으려면 중세가 시작되기 바로 이전 시기였던 그리스의 고전 학문이나 예술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모방의 해석에 다양한 견해들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모방이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 게 재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결점을 보정하거나 취사선택을 해야 하며, 현상 대신 그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모방의 대상으로 서의 자연 그 자체보다 더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모방이 야말로 예술의 길이며 창조에 이르는 길' 이라는 거의 등식에 가까운 모방이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위 물리적인 재현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지각상을 중요 과제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예술심리학자 아른하임(Rudolf Arnheim) 역시 그의 저서 '미술과 시지각' 에서, 기원전 5세기경부터 시작되어온 모방이론 전반에 걸쳐 그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과연 과거의 예술인 모두가모 방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행했던 것들은 실제로부터 가장 철저하게 이탈했을 가능성까지를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창조성(Creativity)에 가까운 용어상의 흔적을 희랍어의 크레아티오(Creatio)와 라틴어의 크레아레(Creare)에서 발견할 있고, 이에 대한 두 번째 생각의 바탕을 르네상스가 마련해 주었다면, 세 번째의 바탕은 아마도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제공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계몽(啓蒙)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알게 함, 또는 정신이 흐리고 어두운 상태로부터 올바르고 뚜렷한 정신 상태로 되돌아오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 즉 칸트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데카르트, 존 로크 등은 그때까지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어 계몽할 필요성을 주창하였던 사람들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말하고 있는 '잠들어 있는 대중'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적 종교나 관습, 제도 등의 주술(呪術)에 묶여 있는 인간이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몽매했던 생각의 쇠사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각자의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 처세술, 창조로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던 것이다.

 

 네 번째의 결정적인 바탕은 낭만주의에 의해 주어졌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발생하였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 의는 시대 구분을 명확히 하기 어려울 만큼 거의 동시대의 사조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로코코의 말기와도 실질적인 구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은 매우 달랐다. 그러한 생각의 계기를 던져준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계몽주의가 추구했던 최고의 목표는 합리적이지 못한 정치 체제의 타파였다. 그러나 혁명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추악하고도 어쩔 수 없는 한계성을 깨닫고 모두가 절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폐허 위에 자신의 감성과 심성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 낭만주의 정신의 본질이다.

  
 미메시스와 이미테이션(Imitation), 창조성에 대한 오랜 여행을 끝내고 그것들이 오늘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개념으로 정착하도 록 역할을 한 이들은 바로 낭만주의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이 신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로고스만으로 세상을 창조할 능 력은 없지만, 신에 의해서 주어진 질료를 원재료로 하여 인간의 생각과 감각으로 새롭게 재구성할 창조력을 가질 수 있는 주체로 보 았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 결국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면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행위를 지속해 왔지만, 그것에 대한 시대적 해석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사람들의 생각이 변함에 따라 모든 시대에 걸쳐 똑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세기 낭만주의 이전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의 그러한 행위에 미메시스 혹은 이미테이션이라는 개념이 붙어 다녔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행위를 모방행위로 규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마치 그것은 1년 내내 자전거 여행만 하고 돌아온 김과장을 1년 전의 동일한 이미지로 맞이할 수 없는 그의 아내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창조성에 대한 개념은 색다름과 색다름을 이끌어내는 정신적 에너지라고 일반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의 개

념 논쟁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색다르다' 라고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색다름이란 이전까지 없었던 어떤 성질이지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란 매우 다양한 것이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새롭게 느껴지는 것일지라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새롭다는 느낌을 주는데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3강 참조).

 

 결국 새로움이란 낡은 요소 즉 이미 존재하는 질료들의 배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의 획득에서 기대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인간은 감 각기관의 수용 한계 그 이상의 능력을 소유할 수 없으며, 또 그들을 걸러 경험되었던 것들, 말하자면 이전에 터득되었던 여러 가지 
붉은 요소들을 표현의 원자재로 삼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창작 기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순수한 어두움과 같은 무의식 속에서의 자동기술, 꿈과 광기 등의 심리적 도구를 이용한 무의식의 탐색, 감옥과도 같은 일상의 밖에서 일어날수 있는 집단 놀이와 검은 유머, 객관성과 필연성으로 묶여진 우연, 빠삐에꼴레, 콜라주, 프로타주...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센 물결을 타고 현대회화가 그 기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빠스띠슈(pastiche: 차용)라든가 패러디(parody:풍자적 모방), 혼성모방 등은 어쩌면 이러한 낡은 요소들의 제한된 배합방식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현대인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것들은 새로움을 얻어내려는 방식의 확대일 뿐,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로 해석될 성질은 전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직도 우리는 '창조'의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연을 완전한 객관적인 대상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그러한 걱정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까지도 자연의 일부라는, 보다 큰 관점을 채택한다면 미메시스에서 굳이 창조성을 꺼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선인들의 사고에 아직도 동의할 여지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방이란 창조를 낳는 모태이기도 하고, 그그 일부는 기피되어야 할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특강 - 인간심리와 그래픽디자인. 미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