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그래픽 디자인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디자인 컨셉트 설정
프랑스의 작가 까뮤의 구토를 말하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대화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소위 실존주의 철학 사상이 풍미하였던 1960년대의 일이다. 그 중 특히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인간은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 라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풀어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어떤 쓸모를 전제로 하여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앞세워야 할 아무런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먼저 태어난 존재라는 말이다. 칼이라든가 망치 등은 무엇을 잘라야 하고 무언가를 두들겨 박거나 빼내어야 할 필요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마땅히 칼이나 망치는 그것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할 본질(쓸모, 혹은 기능)에 후행하는 존재물이다.
인간은 이러한 본질에 앞서는 존재물이므로, 일단 태어난 이상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목표 삼아 살아가야 하는 지, 또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더구나 인간은, 칼 야스퍼스가 말한 바처럼, 죽음이라든가 죄책감, 고뇌와 투쟁 등의 한계 상황 속에 갇힌 자이며 이들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이 당시 젊은이들의 지적 흥미를 단숨에 끌어 모을 수 있었던 점은 아마도 '본질에 선행하는 인간 존재' 라는 독특한 패러다임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것들이 어떤 것은 필요성과 상관없이 생산되고, 또 어떤 것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되어 왔다면, 그러한 부작위성 때문에 인간실존에 대한 철학적 담론은 새로운 관점으로서의 신선한 매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인 창세기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데 있어 빈틈없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필요와 쓸모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듯이 지구상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 어떤 것이든, 필요성보다 앞서 제작된 것은 없다. 인간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본질에 선행하는 것은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찮은 것을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전제하고 그에 합당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같이 무엇을 어떻게 디자인할까에 대한 생각을 제작에 앞서 설정하는 일을 '디자인 컨셉트(concept) 설정' 이라고 말한다.
<(키워드> 디자인 개념
디자인 컨셉트
디자인 아트웍을 위한 사전 개념 설정을 말한다. 이것이 설정되지 않으면 디자인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제품 생산의 경우에는 프로덕트 컨셉트(Product Concept)의 설정이 필요하고 이를 광고하려고 할 경우에는 광고 컨셉(Ads.Concept)의 설정이 필요하다. 대부분 이러한 컨셉트 설정은 한때 마케터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디자이너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컨셉트는 마침내 인간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디자인 결과물의 형태로 마감되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들도 각종 디자인물을 제작하기에 앞서 컨셉트 설정을 한다.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만들까에 대한 처음의 생각이 제품의 속성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래픽 디자인에 있어서도 컨셉트 설정은 최종 디자인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음의 예화를 살퍼보자.
찬수는 민영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민영이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경우에는 애인처림 다가 왔다가도 또 어떤 때는 전혀 딴 사람처럼 쌀쌀맞게 굴기도 하였다. 드디어 찬수는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가 오래 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녀가 싫다면 깨끗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고백하는 일은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핸드폰 문자메시지? 편지?
앞의 전달 방식은 너무 경박스럽다는 느낌이었고, 다음의 방식은 너무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하나의 아이디어가 그의 머릿속에 혜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자기가 민영에게 얼마나 홀륭한 상대인가를 드러내는 자기 광고를 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드 크기로 프린트하면 좋을 것이었다. 찬수는 간단한 헤드라인을 구상해 보았다. '언제나 충실한 종'이 되겠다고 말할까? 아니면 '가슴이 넓은 남자' 혹은 '믿음직스러운 남자' 라고 하면 어떨까?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다 해도 당신은 지울 수 없다' 라고 할까? 수없이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맴돌았지만 어떤 말이 한 마디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지 자신이 없었다.
이 이야기 속의 찬수는 바로 우리 주변에서 혼히 만날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친구일 수도, 디자이너 자신일 수도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의 찬수의 고민은 컨셉트를 어떻게 설정할까 하는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고민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오늘날, 흔히 그래픽 디자인의 총아라고 불리는 포스터나 광고 디자인을 할 경우에도 이러한 디자인 컨셉트 설정 과정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때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할 점은 상대가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만족시킬만한 이야기꾼(메시지 송출자)인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소비자의 니즈(Needs)와 제품의 특성 파악이라고 부른 다. 찬수의 경우 소비자의 니즈란 말할 필요도 없이 민영이의 애인관일 것이며 제품의 특성 파악은 민영이의 그러한 마인드에 맞는 찬수 자신이 가지고 있음직한 장점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제 이러한 디자인 컨셉트를 설정하는 일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어 하나의 신문광고나 잡지광고를 위해서 몇 개월씩 연구를 한 다음에 이루어질 만큼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다음의 다이어그램을 보면 이러한 과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다이어그램은 실제 광고 컨셉트가 이루어지는 간단한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이어그램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포스터가 되었든 광고가 되었든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에 드는, 즉 소비자의 니즈라고 하는 거름 채를 거쳐 나오는 요인을 컨셉트로 추출하여 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꽤 두껍고 탄력성이 좋은 한 장의 종이를 내가 가지고 있다. 두껍다는 점과 탄력성이 좋다는 특성은 그 종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일까, 단점일까? 자판기의 커피를 여러 잔 뽑아 동료들에게 나뉘주려는 회사원에게는 그것은 분명한 장점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급하게 공중화장실로 뛰어가는 젊은이에게는 이러한 특성이 단점일 수도 있다. 이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이나 사회적 현상의 특징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장점이거나 단점을 갖지 않는다.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욕구나 필요, 즉 소비자 욕구나 필요라고 하는 채를 통과하지 않으면 그것은 장점이나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고 가치중립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결국 디자인 컨셉트는 메시지 송출자가 수용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말이며, 이를 찾아내는 일을 컨셉트 설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의 승용차에 '오빠, 주말에 데이트해요' 라는 스티커를 꽂아 놓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시각언어를 송출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출처]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특강 - 인간심리와 그래픽디자인. 미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