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학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 특강 - 1강 그래픽 디자인이란 무엇인가(2)

그래픽디자이너 K아저씨 이야기 2024. 9. 11. 16:42

1강 그래픽 디자인이란 무엇인가(2)


언어의 층위, 그래픽 디자인  

 
멕스는 그의 저술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을 종합하여 '그래픽 디자인의 전주곡' 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책의 대부분은 산업혁명 이후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 이르기까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가 선사시대의 동굴벽화까지 그래픽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싶어 했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의도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인간 체험의 도형적 서술의 한 측면이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관점이다. 
 
 그림 1-1은 이에 대한 좋은 보기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그림이  당시 그래픽이라는 관점에서 디자인한 결과물은 아니다. 더 나아가 왜 이러한 그림을 남겼는가에 대한 해석조차도 분분하다. 어떤  이는 이를 주술적 목적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또 어떤 이는 그림 문자(Pictographs)로, 또 어떤 이는 사냥이 끝난 다음 유희적 목적으로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오늘날 이에 대한 어떤 주장도 강력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이것이 단순한 추축이란 점 때문만이 아니라, 모두가 조금씩 자실예 근접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나 이들을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가에 대한 분분한 주장과 상관없는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체험의 세계를 시각화했다는 점이다. 
 

그림 1-1 남프랑스 로르떼 (Lorthet) 동굴에서 발견된 사슴 뿔에 새겨진 그림
그림 1-1 남프랑스 로르떼 (Lorthet) 동굴에서 발견된 사슴 뿔에 새겨진 그림

 
당시에 살았을 한 젊은이를 상상해 보자. 그는 아침부터 동네 어른들과 함께 들과 산으로 가서 사냥을 하여 먹이가 될 만한 들짐승들을 잡아 왔다. 몸은 지쳤지만 낮 동안 그에게 흥분과 긴장감을 주었던 그 팔팔하던 짐승들이 그와 그의 동료들 앞에서 적당한 먹잇감으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그 짐승을 힘차게 내달리게 했던 튼실한 뒷다리의 근육살은 그의 몫으로 배당되었다. 사냥을 하면서 다치거나 짐승들에게 채어서 죽어간 동료도 떠올랐다. 거의 잡았다 놓친 사습은 그의 망막에 지금도 남아 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창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들소의 모습도 떠오른다.   

우리는 지금 선사시대의 한 젊은이가 체험했을 법한 각종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다. 만일 이러한 체험들이 구체적인 형태  를 띠고 바위벽에 그려지거나 새겨지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들이 보무 표현의 형식을 띠고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또 체험의 세계는 애매하고 불분명한 것이어서 그것은 무의식과 잠재의식 속으로 잡기는 수도 많다. 이것을 표충으로 끌어올리는 층위(層位)가 표상(表象)이며 언어이다. 그러므로 표상과 언어는 본체인 인간체험의 세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용(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언어적 구조를 통해 의식의 상당 부분을 밖으로  드러내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시각적 체험으로서의 이미지들을 한글이나 영어와 같은 언어적인 표현으로 번역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들은 의식 속에 대부분 내장되거나 표현력을 가진 극히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만 시각화되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을 인간의 정신활동이 표상을 창조해내고 나아가 그것을 물화(物化)하는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체용(體用)이다. 
 
 홍익대 진형준 교수는 [디자인 문화비평]이라는 책에서 이미지란 감각적 내용을 구체적인 물질 위에 객관화, 육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어 말하면, 우리의 체험의 세계는 애매하고 불확실하며 비물질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만 이것들을 밖으로 드러내려면 어떻게든 그것에 물질적인 옷을 입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 인간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물화된 매개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타인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할 어떠한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체용의 문제에서 용(用)이며, 물화(物化) 과정에 해당한다. 기독교 사상에서는 이를 화육(化肉-Incarnation)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간화)을 통해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내용이 요한복음에 잘 요약되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뇌어 우리 기운네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황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반하더라(요한복음 1장 14절) 

 하나님의 로고스(Logos)는 형체가 없으므로 그 자체로서 인간에  게 현현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리는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키워드>  기만  소외 신성모독 자체증식
이미지 홍익대 불문과 교수인 진형준 교수는 1998년에 시각디자인과 대학원에 개설한 강좌 <이미지와 상상력>에 시각디자인 전공의 안상 소외  수 교수와 팀티칭 교수로 공동 참여하였다. 그는 디자인 문화비평]이 신성모독  라는 책에 실린 <인문학으로 본 이미지의 가치>라는 글에서 이미지를 자체증식  언제나 그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리는 뜻에서 실재가 아니라고 말하면  서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추상적으로 정의 내리지 않기에 개념 또  한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이미지의 세계가 가져다  즐 수 있는 비난과 우려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미  지의 기만성, 이미지가 인간을 소외시킬 수 있는 구조성, 우상숭배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신성 모독성, 이미지의 자체중식성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인간에 의해 자기체험을 불화하였다면 그것이 성대를 떨게  하여 청각기관에 자극을 주었든, 그림이나 기호로 나타나서 시각  기관에 자극을 주었든, 촉각기관에 자극을 주었든, 물화된 그것들  은 넓은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언어이다. 무언가  남에게 자기의 체험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그러한 물화과정은 어떤 사람에게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앞 장의 사슴뿔에  새겨진 그림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누가 왜 그것을 그렸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 그림을 새긴 이는 자기 체험을 이러한 이미지  를 통해 누군가에게 드러내려고 했음에 틀림없다. 멕스가 선사시  대의 동굴벽화나 암각화 통을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자 했던 의도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지들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퉁 각각의 감각기관에 의해 전달되는 자극들을 받아서 인간의 대뇌피질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이 시자극이 아니고 청각이나 후각, 촉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그러한 자극들의 원천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상자 속에 손을 넣어 물컹거리는 느낌의 자극을 받았다면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실제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지금 자극을 주고 있는 그것과 가장 유사한 자극의 대상을 경험의 창고로부터 인출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체험 당시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어떤  고정된 모습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친구나 가족에 대한 기억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고 해서 그들의 기억 이미지도 동영상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상황과 표정이 박제된 상태로의 시각 이미지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뇌 속에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모든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다 저장되어 있고 이미지 재생의 경우에도 정지된 단일 화면을 인출하는 것이 아니라 동화상 전체를 출력해  야 한다면 아마 그의 뇌는 용량이 부족한 컴퓨터처럼 어느 순간 다운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동영상 이미지가 범람하고 있는 환경 속에서도 그래픽 디자인이 위축되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수많은 움직임 중에 가장 강털하고 특징적인 이미지만이 살아납아서 정지 화면으로 정착되고. 또 모든 심리적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단일화하여 드러나는 인간의 기억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그림은 이에 대한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  
 

그림 1-2 봉자와 현숙
그림 1-2 봉자와 현숙


이 그래픽 캐릭터에는 누가 봉자이고 누가 현숙인지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봉자는 어떻게 생겨야 하고 현숙이는 어떻게 생겨야 한다는 아무런 규정도 없다. 그러나 봉자와 현숙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막연한 이미지조차도, 우리들의 뇌 속에 어떤 형상으로든 내재되어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이 보기의 그림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음직한 그러한 이미지의 형상에 어느 정도의 닮은꼴 단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봉자나 현숙이의 표준화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2차원의 시각물, 즉 그래픽 아트는 이같이 우리들의 경험의 세계를 가장 밀도 있게 농축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모든 이미지들을 압축하여 단일한 이미지를 그려내는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 메타언어 그리고 신화  


 선사시대 이래 인류와 함께 해왔던 언어의 층위로서의 그래픽 아트는 시간이 흐르면서 회화로, 문자로, 무늬로 갈래 지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본질은 인류의 체험을 나눠 갖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매체' 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오직 문자만이 제법 먼 길을 떠나 문화적으로 약속된 기호로서의 특징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회화나 무  늬들은 지금도 활화석과 같은 초기 그래픽의 속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것은 회화나 무늬의 영역에 종사해왔던 사람들이 문자  영역의 그들보다 게을렀거나 덜 창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특질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의 특징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그림언어가 가지고 있는 범국제성과 즉각성, 영속성 등에서 그 속성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속성들은 서로  다른 언어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림언어가 이미지  와 닮은꼴(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약속된 기표를 설  정할 필요가 없음에 근거한다.
 

그림 1-3 &lt;남아프리카식 룰렛&gt; 연극 포스터. 군터 람보우(Gunter Rambow).1988년 상처 입은 손은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일차언어적 기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흘린 피의 혼적을 조작함으로써 아프리카. 생명을 건 도박, 긴장 등의 이차언어(메타언어 )의 기의로 해석, 내용을 유도하고 있다.
그림 1-3 <남아프리카식 룰렛> 연극 포스터. 군터 람보우(Gunter Rambow).1988년 상처 입은 손은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일차언어적 기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흘린 피의 혼적을 조작함으로써 아프리카, 생명을 건 도박, 긴장 등의 이차언어(메타언어)의 기의로 해석, 내용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가 장미라고 말하는 대상은 일본에서는 바라(バラ)라고 발음되고 영국에서는 로즈(Rose)라고 발음된다. 기호학자 소쉬르의  
말처럼 기호의 체계에서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는 꼭 그렇게 약속되어야 할 절대적인 필연성은 없고 오직 자의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화권이 다르면 그 약속된 내용도 달라지고, 그래서 언어의 구현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언어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약속은 구차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일차 언어의 경우에는 대  체적으로 기의와 지시체가 일치하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즉각적으로 해독할 수 있고, 별도의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닮은꼴 도상이기 때문에 영속적으로 우리  들에게 정착된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그림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 같은 속성뿐 아니라 복제가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에 포스터와 같은 디자인물이 새롭게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각광을 받았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불특정 다수에게 기업과 제품의 정보를 빠르고 광범위하게 살포할 필요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외연이 확대되고 보다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요구됨에 따라 그래픽 아트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하고 또 다른 쓸모를 지니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정보화 사회에 들어 와서는 단순한 기술로서의 복제술 자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시각 이미지로서의 지시체가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기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소위 이차언어라고 불리는 메타(Metaphor)언어가 그것이다. 메타언어를 주로 구사하고 있는 그래픽 광고는 그러한 관점에서 창조된 신화라고까지 말해지고 있다. 이는 또 다른 복잡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문제이다. 메타언어와 창조, 미메시스 등에 대해서는 2강과 3강에서 추가해서 다루기로 하겠다.   

 지금까지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개념 정의에 대해서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해 왔다. 이러한 설명이 여러분들이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는지 잘 알 수는 없다. 긴 설명이 오히려 짧은 정의보다 명화성과 명쾌성을 가릴 수도 있음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거칠지만 그래픽 디자인을 둘러싸고 있는 논의들을 간략히 정의함으로써 몇 줄의 개념 정의가 왜 그러한 표현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물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긴 여행을  한 사람과 원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사람 사이에는 자신에 대한 인식의 층차가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출처]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특강 - 인간심리와 그래픽디자인. 미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