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그래픽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개념 정의를 위한 몇 가지 생각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우리가 취하는 습관적인 행동은 어떤 것들일까? 담뱃갑에 손이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배달된 신문을 집어 올 것이다. 담뱃갑 디자인, 휴대전화의 각종 문자 메시지나 아이콘, 신문에 게재된 광고물... 이것이 모두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들어 낸 산물이다. 어쩌면 아침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그것들을 본다기보다 그것들에게 우리가 노출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오늘날 그래픽 디자인의 세계와 무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그래픽 디자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개념을 정의하는 방법에는(개념적 정의와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 두 가지가 있다. 개념적 정의란 어떤 개념을 정의할 때, 이미 알고 있는 보다 쉬운 다른 개념을 이용하여 얻고자 하는 개념을 정의하는 방법이고, 조작적 정의란 측정 가능한 구체적인 현상과 경험적으로 관찰이 가능하도록 규정하는 정의 방식이다. '라면을 즐겨 먹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하루에 몇 개 이상 먹는 사람으로 규정할 것인지 '소비 라면의 수' 를 설정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만일 하루에 1.5 봉지 이상 먹는 소비자를 '즐겨 먹는 사람으로 규정하기로 했다면 매일 1 봉지씩을 먹는 사람은 헤비 유저(Heavy User)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조작적(혹은 계수적) 정의 방식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논의하려는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정의는 그것을 계수하여 얻어낼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보다 쉽고 일반적인 다른 개념을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개념' 이란 것이 물품 저장 창고 같은 곳에 공동 소유의 공산품처럼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머릿속에 각각의 편차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겨울과 봄의 경계를 우리가 계수적 정의처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없음과 비슷하다. 2월 28일은 겨울이고 3월 1일은 봄인가? 이러한 질문에 누가 자신 있는 답을 할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은 어떤 뛰어난 대답보다 위대하다고 말한 바 있는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 Kahn)이 이러한 질문을 들었다면 아마 실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그림자의 경계선을 따려고 시도했을 때에도 경험된다. 땅에 드리워진 친구의 그림자를 그리려고 땅에 시선을 가까이하면, 그림자의 경계가 뜻밖에 선을 그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해할 것이다. 이같이 각각의 인간의 뇌 속에 머물러 있는 개별적인 개념들을 묶어 새로운 개념을 얻고자 하는 한, 개념적 정의라는 방식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줌의 모래가 땅 위로 떨어질 때 어떤 알갱이는 멀리 바람에 날리기도 하지만 수북하게 쌓이는 부분도 만들어지듯 개념적 정의 방식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중심덩이(Norm)를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편차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만족해야 한다. 햇볕이 내리쬐는 부분과 그림자가 드리위진 부분을 분명하게 구분 지으려면 어느 정도의 오차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선을 긋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실제 그러한 선이 그어짐으로써, 선을 그었던 사람과 그림자를 드리웠던 사람이 그 장소를 떠난 뒤에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러한 현상을 미루어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음은 여러 사전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정리하여 그래픽 디자인의 개념 정의를 따로 한 것이다.
<키워드> 2차원의 평면
그래픽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그라피코스(Graphikos)라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은 '글씨를 쓰다. 도식화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회화, 디자인, 인쇄 등 평면 위에 도형을 나타내는 기술을 그래픽 아트라고 총칭하는데, 그래픽 디자인이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된 것은 포스터 등 인쇄에 의한 디자인의 가치가 광고 매체로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던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포스터. 신문잡지광고, 책장정, 타이포그래피, 기업이미지 디자인. 인쇄에 의한 각종 포장 디자인 등이 주요 그래픽 디자인이다. 이는 평면 위에 도형이나 색채로 표현된 모든 조형 예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협의로는 복제될 수 있는 예술을 말하며 판화로부터 시작된 형식이다. 따라서 시각전달을 목적으로 인쇄기술에 의해 대량 복제된 평면적 표현에 대한 디자인 일반을 말한다. (박션의 | 디자인 사전 | 미진사 | 1990년, 곽대응 외 | 디자인 대사전 | 숭례문 | 1994년, 안그리픽스 I 디자인 사전 | 2000년, 박대순 | 현대 디자인 용어 사전 | 디자인오피스 | 1996년 참조)
이러한 내용이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만족스러운 개념 설명인가?
대체로 이러한 정의는 전공자 또는 비전공자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설명이 되기 쉽다. 우선 비전공자에게는 보다 쉬운 일반화된 다른 개념들, 말하자면 판화라든가 신문, 잡지 광고나 타이포그래피 또는 기업 이미지 디자인 통의 하위 개념들조차도 생경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공자들은 어떤가. 이러한 정의가 명쾌한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도 비전공자에 못지않게 불민족스러운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기 위해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디자인 실무에 관계하고 있는 전공자들의 눈은 그림자의 어두운 정도에 암 순웅이 되어 경계를 그같이 설정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기 어렵게 된다. 단순히 그러한 정의에 만족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 잡다하여, 개념정의가 그것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 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가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철학자를 불러 물었다. 수 년 뒤 그 철학자는 세 수레 분량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 많은 분량의 책을 읽기에는 남은 생애가 충분치 않다고 말하였다. 수 년 뒤 그 철학 자는 세 권의 책으로 앞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왔다. 왕은 노쇠하여 세 권의 책을 읽기에도 기력이 달린다며 다시 요약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수 년 뒤 마침내 철학자가 한 권의 책을 바치러 왔을 때, 이미 왕은 병석에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이제 한 권의 책 도 읽을 수 없다며 왕은 단 한 마디로 삶에 대한 진리를 말해 달라고 철인에게 힘겨워하며 부탁하였다. 그래서 철학자는 인간이란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답하였다. 철학자가 말을 마치자 왕은 숨을 거두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어떤 개념에 대한 정의가 짧고 단순할수록 명쾌성이 증대하는 반면 설명량은 반비레하여 감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설명이 증대하면 개념의 명쾌성과 일목요연성은 감소한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세 수레 분량의 책을 읽고 다시 세 권의 요약본을 통하여 내용을 정리하고 또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마감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 철인의 한마디 말을 들었더라면 왕은 인생 전반을 요약도 할 수 있고 때로는 장황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는 풍부한 철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앞부분의 개념 정의만으로는 그래픽 디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만족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필립 B. 덱스(Meggs)가 저술한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라는 책은 기원전 10000 ~1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의 동굴벽화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를 시간의 날줄 위에 엮어낸 책이다. 이렇게 보면 이 한 권의 책은 철학자의 세 수례 분량의 책에 견줄 수 있는 그래픽 디자인의 광범위한 세계를 짐작하게 해 준다. 물론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래픽 자료 중에서 멕스가 개인적으로 측 정한 중요도에 따라 어떤 것은 버리고 또 어떤 것은 의미 있는 것으로 취하여 이 저술의 내용을 편집하였을 것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실이나 기록물 모두 역사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록에 남겨야 할 과거의 사실이 무한에 가깝고 기록할 지면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록자의 눈에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사건은 버리기 때문이다. 아마 멕스도 이 책에서 어떤 자료는 버리고 또 어떤 자료는 취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사학가들이 범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시각(視覺)은 E. H. 카(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래픽 디자인 일반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과 해석의 측면에서 멕스의 책 보다 충실한 것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출처] 오근재의 그래픽디자인특강 - 인간심리와 그래픽디자인. 미진사 2005